정인지 묘

정인지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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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명칭 정인지 묘
카테고리 민속자원 > 유형자원
 불정면
 자체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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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계사업

정인지 묘등록된 이미지가 없습니다.등록된 이미지가 없습니다.등록된 이미지가 없습니다.등록된 이미지가 없습니다.

자원의 내용 및 특징

  •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 산44 (일곽)

    정인지 선생을 찾아

    정인지의 행적 
    정인지(鄭麟趾, 1396∼1478)는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하동(河東)이고, 자는 백저(伯雎) 호는 학역재(學易齋)이다. 태종 때 나이 19세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그리고 또 세종 때 치러진 중시에서도 장원으로 급제해 일찍부터 문장과 학문이 세상에 알려졌다. 일찍이 정인지의 아비, 흥인(興仁)은 여러 번 과거를 보았으나 모두 낙방을 했다. 마침 집 근처에 소격서(昭格署)가 있어 그는 자주 그곳에 가 기도를 드렸다. "나는 이미 성공하지 못했으니 바라건대 집을 일으킬 아들을 낳게 해 주십시요.' 정인지는 어려서부터 행동이나 몸가짐이 보통 아이들과는 달랐다. 주위에서는 모두 별자리의 정기(精氣)를 받고 태어났다고 했다. 13살에 대학(大學)에 껤의 간 정인지는 6년 동읈 밤낮으로 여러 경서를 배우고 익혔다. 그 열정에 함께 공부하던 선비들이 혀를 내두르며 탄복했으며, 마침내 나이 19세의 어린 나이로 장원으로 급제했다.

    세종 초기였다. 하루는 태종이, "대임을 맡길 만한 인물이니 중용하라."
    라고 특별히 요청하자, 세종은 정인지를 하루 아침에 병조정랑에 발탁했다. 그 후는 세종의 특별한 신임을 받으며 높은 벼슬을 지냈다. 세종 때의 업적으로는 집현전 학사로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기여하고, 권제(權 )·안지(安止)등과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짓고, 김종서(金宗瑞)등과 고려사(高麗史)를 수하기도 했다. 하루는 세조가 정인지의 집을 직접 찾아와 대뜸 침실로 들어가더니 손을 잡았다.

         " 공(公)과 혼인을 맺어야겠오."

    정인지는 곧 그 뜻을 알아차리고 혼인을 승낙했다. 혼인을 약속한 것은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정권을 찬탈한 계유정난에 힘을 합치자는 제의였던 것이다. 거사가 있던 날 정인지는 집안사람들에게, "오늘 오후 사람을 보내 성패를 통지할 테니 만약 소식이 없으면 내가 죽은 줄 알아라." 하였다. 오후가 되어 정난이 성공하자, 사람을 통해 속옷 한 가지를 보냈는데 온통 피땀으로 얼룩져 있었다 한다. 정난에 협찬한 공으로 정인지는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이 봉해지고 세조를 도와 세종 이후 실추된 왕권 회복에 힘썼다.

    먼저 의정부(議政府)를 폐지해 권신들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백관을 거느리고 영월로 유배된 노산군(魯山君:단종)을 죽일 것도 요청했다. 이 일은 훗날 뜻있는 지사들의 빈축을 사 그의 이름이 세상에 빛을 보는데 어렵게 했다.

    정인지의 묘를 찾아서 
    정인지의 묘는 불정면 외령리에 있다. 입구에는 거목이된 참나무가 넓은 그늘을 드리우고 그 아래에 '河東鄭氏文成公墓所入口(하동정씨문성공묘소입구)'라고 쓴 대리석 푯말이 서 있다. 마을 길을 끼고 돌아가면 넓은 잔디밭이 있고 그곳에 정자각과 신도비가 우뚝 서 있다. 정인지는 왕족이 아닌데 재실을 정자각으로 지은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묘를 가꾸는 석물과 건물은 왕족과 신하 그리고 품계에 따라 엄격히 구분되어 정하는데, 정자각은 왕족의 능(陵)에만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도비는 묘로 올라가는 입구에 있는 것과 정자각 옆에 있는 것등 두 개가 따로 서 있다. 하지만 두 개 모두 본래의 것은 아니다. 정자각 옆의 신도비는 최근에 세운 것으로 대리석 귀부에 오석의 비신을 세웠고, 입구의 신도비는 장방형 기단에 오석 비신을 세운 뒤 팔작지붕 옥개석을 얹었다. 이곳에는 본래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신도비가 있었는데, 오랜 세월로 없어져 1958년에 다시 세운 비이다.

    묘로 오르는 길은 워낙 가파라 길이 '갈 지(之)'모양으로 나 있고, 산 마루에 오르면 묘 두기가 일렬로 모셔져 있다. 정인지의 묘는 앞의 것이다. 양쪽으론 문인상이 시립하고 중앙에는 작지만 아담한 장명등이 설치되었다. 하지만 정작 눈길을 끄는 것은 제를 올리는 상석 뒤쪽에 고색창연한 묘비(墓碑)가 본봉의 중앙에 서 있는 점이다. 비신의 재질은 차돌로 오백 년이 넘는 풍상을 견디며 이끼 때문에 거무스름하게 변했다.

    비문에는'有明朝鮮國輸忠 社 贊靖難同德佐翼定難翊戴純誠明亮經濟佐理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河東府院君兼領經筵書雲館事諡文成鄭公之墓.貞敬夫人慶州李氏之墓(유명조선국수충 사협찬정난동덕좌익정난익대순성명량경제좌리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영의정하동부원군겸영경연서운관사시문성정공지묘.정경부인경주이씨지묘)'라 쓰여있다.

    본봉은 호석없이 잔디만 곱게 자라고, 주변에는 푸른 소나무가 일렬로 서 있어 청량감을 더해 준다. 그런데 묘비에는 부인 경주이씨의 명문(銘文)이 있는데, 실제 묘는 정인지의 뒤쪽에 따로 모신 이유는 알 수 없다. 몰론 묘비에는 합장을 했다는 '부좌'의 명문은 없다. 부인의 묘는 석물이 남편의 것과 같고 묘비만 오석 비신에 이층의 옥개석을 얹었다. 이끼 긴 문인석상으로 보아 처음부터 따로 모셨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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