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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경(李浚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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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명칭 이준경(李浚慶)
카테고리 우리지역인물 > 이야기속인물
 청안면
 자체조사
매체유형 원문
연계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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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의 내용 및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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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준경(1499-1542): 본관은 광주, 자는 원길(遠吉), 호는 동고(東皐),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괴산에 유배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문과에 급제하고 영의정을 지냈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청안 귀계서원에 제향되었다.

    벌 받아도 할 말을 하는 이준경

    이준경(李浚慶)은 몸가짐이 맑고 검소하며 행동이 방정하고 엄격하며 덕망이 두터워 여러 사람들이 신망하였지만, 때로는 후진들과 뜻이 맞지 않아 미움도 받았는데 정승으로 남긴 업적은 매우 컸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어 홀어머니 손에서 자랐는데 어머니 신씨(申氏)는 늘「대학(大學)」과「효경(孝經)」을 가르치면서 타이르기를,
    “옛부터 ‘과부의 자식과 사귀지 말라’는 말이 있으니 너는 그런 소리를 듣지 않도록 공부를 남보다 열심히 하여 우리 집안의 이름을 떨어뜨지리 말라.”
    고 하였다. 이준경은 형 이윤경(李潤慶)과 함께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들어 종형인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의 문하에서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어렸을 때 남명(南冥) 조식(曺植)과 같이 절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이준경은 작난을 하면서도 항상 나라를 위하겠다는 생각으로 조식에게 말하기를,
    “너는 바위굴 속에서 말라 죽을 인물이다.”
    라고 놀렸다. 또 정승이 되자 조식에게,
    “그대는 앞으로 소나무같이 높이 솟고 칡넝쿨같이 아래로 뻗지 말길 바라네.”
    라는 편지를 보내어 충고하였다. 이준경이 동부승지로 있을 때 유희(兪姬)라는 기생을 도승지 홍섬(洪暹)과 유생 송강(宋康)이 가까이 했는데 어느 날 홍섬이 승정원의 여러 승지들 앞에서,
    “송강이 죽었다네. 그 사람은 나와 생년월일시가 똑같은데, 출세는 나보다 늦고 죽는 것은 빠르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야.”
    하니 이준경이 말하기를,
    “도승지 영감도 유희를 사랑했고, 송강도 유희를 사랑했으니 운명도 같고 행한 것도 같지 않습니까?”
    하니 여러 승지들이 놀라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승정원에서는 승지들이 도승지에게는 농담을 하지 못하고, 만일 도승지에게 불경스런 말이나 행동이 있으면 그 벌로 승정원 관원에게 잔치를 베푸는 것이 관례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으로 이준경은 도승지에게 농담한 벌로 일곱 번이나 잔치를 베풀었다. 그런데 누가 이준경에게 도승지에게 농담한 일을 말하면 이준경은,
    “도승지에게 농담한 벌로 우리 집 재산을 다 날려도 이야기 실마리가 멋지니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네.”
    라고 하였다. <대동기문(大東奇聞)>

    중국사신도 인정한 이준경

    융경(隆慶) 정묘년 6월에 명종이 승하하자 중국의 한림(翰林) 허국(許國)과 병부 위시량(魏時亮)이 등극사(登極使)로 우리나라에 와서 묻기를,
    “너희 나라에 왕세자가 있는가?”
    라 물어 없다고 하니 다시 묻기를,
    “그럼 왕의 형제가 있는가?”
    라 물어 없다고 하니 다시 묻기를,
    “그럼, 영상(領相)이 누군가?”
    하여 이준경이라고 대답하니 등극사들이,
    “그 사람은 문장이고 덕이 높으니 나라의 기둥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나라는 걱정이 없다.”
    고 하였다.

    공신명단을 태워 버린 이준경

    명종이 승하하였을 때 후사(後嗣)가 없었다. 당시 동고 이준경이 영의정이었는데 인순왕비의 숙부인 좌의정 심통원(沈通源)이 약방제조로 궁궐에 있다가 후사문제로 혼란이 생길 것을 걱정하여 궁궐 대문을 잠그고 둘이 상의하여 선조를 다음의 임금으로 추대하였다. 그러자 새 임금을 호위하여 공을 얻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드는데 선비 이지강(李志剛)이 뒤늦게 달려와서 큰소리로,
    “소인도 왔습니다.”
    하니 주서(主書) 황대수(黃大受)가 말하기를,
    “새로 임금을 받들 때는 소인은 필요 없으니 당신 같은 사람은 물러가시오.”
    하자 모든 사람이 통쾌하게 여겼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새 임금을 모시는데 공이 있는 사람의 명단을 만들어 가지고 오니 이준경이 화를 내며,
    “새 임금은 돌아가신 선왕의 유언으로 모신 것인데, 신하들이 무슨 공이 있다고 이런 것을 가지고 오느냐?”
    고 소리치면서 공신명단을 불 속에 던지니 모든 사람이 숙연해졌다.
    <부계기문(涪溪記聞)>

    당쟁을 예견한 이준경

    정승 이준경(李浚慶)이 임종할 때
    “조정 신하들 사이에 장차 붕당(朋黨)이 생길 조짐이 있습니다.”
    라는 표문(表文)을 남겼다. 그때 옥당의 관원으로 있던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상소하기를,
    “임금과 신하를 이간하는 말입니다.”
    하고 또
    “사람이 죽으면서 고약한 말을 했다.”
    고 이준경을 원망까지 하였다. 그런데 선조 때 김효원(金孝元)이 명망이 있어 정랑에 추천되었는데 그때 왕실의 외척인 이조참의 심의겸(沈義謙)이 반대하여 임명되지 못하였다. 그런데 김효원은 명망있는 집의 자제로 학행과 문장이 있고 또 어진 사람을 추천하고 유능한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기를 좋아하여 젊은 선비들에게 환심을 크게 얻고 있었다. 그리하여 젊은 선비들이 일어나 심의겸을 가리켜
    “어진 사람을 거부하고 권세를 농간한다.”
    고 공박하니 나이 많고 벼슬이 높은 사람들이
    “심의겸은 비록 왕실의 외척이긴 하나, 일찍이 간신을 물리치고 선비를 보호한 공이 있다.”
    고 옹호하였다. 이렇게 젊은 선비와 늙은 고관들이 논쟁을 벌이면서 처음에는 하찮은 일이 점점 커지더니 계미년과 갑신년을 지낸 뒤에는 김효원의 집이 동쪽이 있어 그를 지지하는 사람을 ‘동인(東人)’이라 부르고, 심의겸의 집이 서쪽에 있어 그를 지지하는 사람을 ‘서인’이라 부르게 되었다. 동인에 가담한 사람은 유성룡(柳成龍), 김우옹(金宇顒), 이산해(李山海), 정지연(鄭芝衍), 정유길(鄭惟吉), 허봉(許篈), 이발(李潑) 등이고 서인에 가담한 사람은 박순(朴淳), 정철(鄭澈),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구사맹(具思孟) 등인데 이것이 붕당의 시초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이이가 이준경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비로소 알았다. <택리지(擇里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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