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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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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명칭 상미전
카테고리 민속자원 > 지역역사성
 괴산군
 자체조사
매체유형 원문
연계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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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의 내용 및 특징

  • ※  위치
    면 소재지에서 1.2km지점 서남방에 위치한 마을로서 동북쪽에 하미전, 동쪽에 광지실, 남쪽에 매전리와 경계하며 성불산을 등지고 광지실을 향하여 앞에 박달산이 바라 보인다.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서기 1745년부터 미전이라 불리우다 서기 1924년부터 원풍전으로 정확한 기록에 의하여 서기1940년 해방후 현재의 상미전이라 불리우고 있다.

    ※ 지명유래
    본래 충주군 감물면 이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괴산군에 편입 되었다. 해방 560m인 성불산 기슭에 속해있는 현 상미전은 속칭 3개의 마을이 있다. 양지말, 늠말, 동산말로 되어있으니 현재 38가구가 사는 조그만 마을이다. 정확한 이름은 없으나 서기 1745년부터 미전이라 불러오다 서기 1924년부터 원풍전으로 정확한 기록에의하여 서기 1940년 해방후 현재의 상미전이라 불리우고 있다. 상미전은 옛날부터 성불산에 산제당을 모셔놓고 동리에 무사태평과 마을의 발전을 위하여 전 동민이 3일정성을 들여 산신제를 들여왔으며 정치하시절과 험한 6.25동란이후 현재까지 아무런 변고 없이 무사태평하며 동리는 물론 상미전에서 출생하여 타곳으로 이적한 사람도무사했던 것은 성불산을 정성껏 모신 덕분이 아닌가 생각 했다. 상미전 전설로서는 양지말 산밑골에 현재 6000여편되는 논이 있는데 홍이티의 근처에서 옛날토기와가 나오는 것을 볼때 현재의상미전 마을 가구보다 많이 살았다는 증거로 본다.

    ※ 자연마을 및 산천

    ◎ 딱밭 양짓말 : 양지쪽 딱나무밭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너메말 : 웃미랏 너머에 있는 마을로 현재는 늠말이라 부른다.
    ◎ 동산말 : 동산너머 있는 마을이다.
    ◎ 큰말 : 마을에서 호수가 제일 많아 큰말이라 부른다.
    ◎ 샛터말 : 새로운 터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 지당골(제당골) : 과거에 성불산에 제당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 왜마골 : 성불산 나목 하단 새터말 뒷산쪽이다. 지당골에 비해 불경하여 발똑이나 산 기슭에다 묘를 쓰거나 가축이 죽으면 이곳에 버려 왜마골이라 칭하며 아녀자들도 불결하다하여 산나물도 채취하지 않는 곳이다.
    ◎ 차벌 : 우기실 윗쪽, 지당골 밑쪽으로 넓은 경사지의 밭을 구성한 적은 들이 있으나 전부 밭을 이루고 논은 없다. 지명의 전래는 확실한 고증은 없으나 항간의 전설로 성불산이 우마차에 짐을 싣고 달리는 지형같아서 우마차가 달리는 바퀴가 닿는 곳이라하여 차벌이라는 지명으로 전래 되기도 한다.
    ◎ 웃모골 : 성불산 중간 계곡의 길에 뻗은 밑부분은 가르켜 웃모골이라 하는데 물이 위에서 내려와서 웃모골인지는 몰라도 좁은 계곡이라 물막기가 용이하여 현재는 저수지 수로가 계곡을 막고 있어 언제인가는 못이 지형이 될것이라는 유래에서 기인것 같다.
    ◎ 괸들 : 괸들바위 개울을 중심으로 남과 북의 들을 말한다. 그중 남쪽은 들은 수리가 양호하여 한발이 없었으나 북편의 즐은 한근하여 한해(달밤에도 가뭄이 들었다고 함)를 받으면서 농사를 짓다가 현재는 1976년 매전저수지 시설로 관지가 개선 돼어 빼어 놓을수 없는 들로 손꼽히고 있으며 40년대 후반과 50년대 초반 상미전 마을 전성기에는 쌀이 주로 이곳에서 생간되었기에 쌀이 귀했던 그 시절에는 여기에 논을 갖고 있는 사람을 부러워 했다.
    ◎ 이래가리 : 현재 50년 후반 과원을 조성하여 성과기에 접어 들어 짭짤한 소득을 올렸으나 맛좋은 신품종에 밀리고 '80년도 과수불황을 맞아 수종갱신단계에 이르러 주종품국광, 홍옥의 폐원과 더불어 신품종이 재식하고 있다. 이래가리는 병자년 장마시 안민천이 범람하기 시작한 이래 하천의 유형이 변경되어 해마다 장마떄면 많은 농토가 유실되어 웃미랏앞에서 시작 하미전 앞에 이르기 까지 개울의 원형을 잃고 많은 농토가 유실 되었으나 60년도 경종현씨가 중기로 본래의 하천으로 물길을 돌려 농토를 보존하는 대 변혁을 일으켰다. 이를 계기로 상미전과 하미전 사이에 황무지가 돈 농토를 되찾았다. 그 후 구간내 경작인들은 계를 조직하여 황무지를 측량하고 원필을 마르고 , 마른농지는 돌을 치우고 흙을 넣어 농토를 가꾸어 왔다. '76년 장마로 일부 구간이 유실된 것을 정부가 지원으로 제방과 완전한 농토를 보존하면서 현재의 옥토를 만들었다.
    ◎ 돌고개 : 상미전 뒷편에서 서편으로 괴산방면으로 통하는 통로와 우기실들과 연결되어 통행로가 주 몫이 된다. 옛날차편이 없고 도보로 통행하던 시절에는 괴산장을 보거나 괴산방향은 거의 이것을 통했다. 고개는 아주 낮은 고개지만 돌이 많아서 돌고개라고 했는지 유래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돌고개에 유래도니 사연은 몇가지 있다. 첫째는 풍수지리설을 갖고 있는 이야기가 있다. 1948년경 동리가 한창 융성기를 지나 동리의 전답이 타 마을로 매매됨에 그 고개가 빠꼼이 꿇려서 재물이 샌다고 하여 그당시 정동섭이 동민들과 합의하여 뚫린 부분을 성토하여 고개를 막고 길이 짤리지 않은 고개길을 만들어 다녔다. 당시에는 제사도 지내어 서낭귀신을 달래도 예도 치른일이 있으나 그후 10년이 지나도 별다른 효과가 없이 지나자 그 당시 리장은 사망하였고 1958년 다시 고개를 메꾸었던 부분을 3차례에 걸쳐 고개를 낮추었다가 다시막고 다시 뚫는 등의 변화를 가져왔으나 별다른 변화 없이 오늘에 이르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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