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담리의 동고사

사담리의 동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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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명칭 사담리의 동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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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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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담리의 동고사사담리의 동고사등록된 이미지가 없습니다.등록된 이미지가 없습니다.등록된 이미지가 없습니다.

자원의 내용 및 특징

  • 1914년의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이웃한 공림리(公林里)와 하적리 (下赤里, 하적골)를 사담리로 병합하여 괴산군에 편입, 현재에 이르고 있다. 동으로는 이평리(梨坪里), 서쪽은 상신리9上新里), 북은 고성리(古聖里), 그리고 남쪽으로 경북 상주군(尙州郡)과 도계를 이룬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사담리를 따라 흐르는 대방천(大芳川)가에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실시된 “소하천”석축공사로 도로가 면소재지까지 잘 정비되어 있으며, 사담리는 이 대방천을 사이로 하여 2개의 자연마을에 총 26호가 거주하고 있다.

    평양 조씨 배판에 밀양 박씨가 들어 와 살고 있다고는 하나, 현재(1989년)평양 조씨는 5호 뿐이고 그외 박씨(3호)와 타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적지로는 마을 동북쪽의 낙영산9落影山)에 조계종 계열의 공림사(空林寺)와 명칭 불명의 성터가 남아 있다.

    공림사는 신라 경문왕(景文王:861~874)때 자정국사(慈淨國師)가 창건한 절로, 한국전쟁 직전에 공비가 출몰하여 공림사에 있다는 말을 믿고 국군이 와서 불을 질러 사찰 건물이 전부 소실되어 이후 폐사(廢寺)되었다가 1963년에 재건된 절이라 한다.

    이외 공립사에는 조선정종 때 건립된 것으로 전해지는 일주문(一柱門)과, 숙동 14년(1688년) 3월에 공림사의 전설․유래 및 공양탑의납입자 명단 등을 새긴 “낙영산공림사사적비(落影山空林寺史蹟碑)”와 부도(浮屠) 등이 남아 있다.

    그리고 낙영산에 얽힌 전설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충청북도에서 1987년간행한 《전설지》에 채록되어 있어 아래에 그 내용을 약술해 볼까 한다.
    “신라 진평왕 때, 당 고조가 세수를 하려고 아침에 세수물을 떠다 놓았는데 그 물속에 경치가 매우 아름다운 산이 어른거렸다. 그래서 급히 화공을 불러 이 물속의 그림자와 똑같이 그림을 그리게 하여 만천하에 이것과 똑같은 곳을 찾아 보라 하였다. 동자승과 도승의 도움으로 결국 이 산이 신라에 있음을 알고 당 고조가 기뻐하여 이 산을 일러 ‘그림자가 비친 산’이라는 뜻의 낙영산(落影山)이라 하게 되었다”고 한다.

     형태와 위치

    장승은 면소재지에서 동남쪽을 향해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의 양쪽에 각 1기씩 석장승으로 세워져 있다. 입구에서 마을을 향해 왼쪽의 것이 “천하대장군”, 오른쪽이 “지하대장군”이다. 천하대장군의 높이는 86㎝에 둘레가 38㎝이고, 지하여장군은 높이가 74㎝ 둘레가 36㎝이다. 주민들은 장승을 “수문장(守門將)”이라고도 달리 부른다.

    사담리의 장승은 원래는 목장승이 엇고 10년마다 주위 야산의 소나무에서 베어와 새로 교체해 왔다고 하는데, 1980년 수해에 이 목장승이 떠내려 갔고 또 그런 뒤로 마을에 좋지 않은 일이 자주 발생되므로 ’84년도 부터 석장승을 만들어 세운것이라 한다.

    사담리에서 목장승 석장승으로 바뀐 데는, 목장승이 비바람에 쉽게 부패하여 10년마다 교체해야 한다는 번거로움과 또 홍수로 목장승이 떠내려 간 것을 불길하게 여긴 마을 노인들이 주관이 되어 앞으로 장승을 영구히 보존하고자 한 심리가
    적잖이 작용한 것 간다고 이장이 말을 들려주었다.

    현재의 석장승은 청주에서 ‘돌 쪼는 이’를 모셔와, 마을 노인들의 입회하에전의 목장승을 본따 하루 종일 작업하여 만든 것이라 하며, 돌은 화강암으로 경북쪽에 인접한 마을 뒷편의 “석산”(주민들은 이 산을 “돌광”이라 부름)에서 산주인의 양해하에 얻어 온 것이라 한다. 장승은 매우 정교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마 위에
    두줄 음각선으로 얼굴과 머리 위의 관(冠)을 나누고 있다.

     눈썹은 반달형으로 다소 귀 위쪽으로 치솟게 하였고, 눈은 감은 듯한 실눈형태이
    지만 꼬리쪽이 역시 귀쪽으로 올려져 있다. 코 가장자리는 약간 파내려 콧등이 자연 돋아난 모양이고, 양볼과 입술 부위를 반달형으로 파 내 마치 광대뼈가 튀어나온 듯한 모양을 하고 있다. 입은 아래 위의 이가 모두 드러난 모양을 하고 있다. 귀는 얼굴 측면을 모두 덮었으며, 몸체에는 천하대장군과 지하대장군이라 쓴 명문(銘文)이 음각되어 있다.

    사담리는 이 장승 외에도 마을 주신격인 산신을 모시는 “산제당”이 또 하나
    있다. 이 산제당은 마을 뒷편의 남동쪽 산중턱에 있는데 신체는 자연암석으로 높이가 약 150㎝, 전면의 너비가 172㎝나 되는 거석을 산신의 신체이자 신당으로 관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암석 주위의 소나무 및 암석에는 금줄이 처져 있고, 암석의 한쪽 한 구석에 구덩이와 재․숯검정 등이 남아 잇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산신에 바칠 제물을 조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관련의례

    사담리의 “동고사”는 매년 음력으로 정월 초이튿날 저녁 9시경에 지낸다. 동고사는 먼저 “산제단”에서 산신을 위하고 나서, 다시 마을 입구의 장승을 모시는 “장승제”를 지낸다. 산신에게는 마을 안택과 평안을, 그리고 장승에게는 풍농의 기원과 잡귀의 침범을 방지하는 것으로 각각 그 위하는 목적이 다르다.

    제관은 제주(고양주) 1인, 축관 1인, 심부름꾼 2인으로 이들은 제일(祭日)에서 대략 10~20일 전에 주민이 모여 협의하에 선정된다. 선정조건은 모두 생기복덕이 제 당일에 합당하여야 하되 집안에 임산부가 업성야 하고 또 팔촌 이내에 상(喪)당한 이나, 본인이 상해입은 자는 제외된다고 한다.

    일단 제관으로 선정되면 기름진 고기․술․담배는 일체 금하여야 하고, 상가(喪家)나 그외 부정타는 것 등의 이유로 타인과 접촉하는 것을 꺼려 외부출입을 가급적 삼가며,마을에서도 살생과 상해가 발생하는 것을 조심한다. 그외 제관․축관은 보통 제일 전날 목욕재계하여 몸을 깨끗히 해서 동고사에 임하지만, 심부름꾼 2인은 위의 금기가 요구될 뿐 목욕재계까지는 하지 않는다. 이것은 그만큼 전에 비해 동고사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도가 약화된 결과라고 하며, 비록 제관․축관으로 선정되었다고 하더라도 바로 금기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제일에 앞서 하루나 이틀 전쯤 조심하는 정도라 한다.

    심부름꾼 2인은 제비(祭費)의 모금에서부터 제물구입과 조리 및 진설시 보조 역할을 담당한다. 제비는 가호당 쌀이나 현금으로 갹출하지만, 이외 마을 기금이 약 50만원 정도 마련되어 있다. 이 기금으로 주민들에게 대여하여 그 이식으로 제비에 충당하기도 한다. 제물은 섣달 그믐날이나 또는 정월 초하룻날 새벽에 청천시장에 나가 구입해 온다. 제물구입은 고양주가 하며, 새벽에 장을 보는 것은 도중에 부정한 사람과 마주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장에 가서는 절대 값을 깎지 않고 또 일단 들어간 점포에서 그대로 구입한다. 사담리에서 청천시장까지는 약 13㎞이다. 제물은 수퇘지머리 하나에 돼지고기 약간(전에는 통돼지 한마리를 구입했다 함), 그리고 밤․대추․곶감과 명태 4마리 등이 고 이때 양초와 소지용 한지도 함께 구입한다. 이외 심부름꾼 집에서 청주․백설기(시루째 2개)․메․탕 등을 따로 마련하기도 하며, 제기(祭器)는 특별히 따로구입치 않고 옛부터 전해져 오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올해(1989년) 동고사 비용으로는 모두 100,000원 정도가 지출되었다 한다.

    정월 초하루날 주민 각자가 차례를 지내고 난 후, 저녁 무렵부터 제관집과 산제당․장승에 왼새끼로 꼰 금줄을 친다. 그리고 다음날(1월 2일) 식전에 “조든밥과 술밥”을 해 가지고 조그마한 항아리에 담은 후 산제당 바위 한 구석에 갖다 놓는다.

    그리고 이것을 이날 저녁 제주로 사용한다. 오전 11시경 산제당으로 가서 밥을 지어 이것을 당 앞에다 놓고, 고양주 집에서는 돼지를 삶는다. 저녁 9시경 제관 일행이 산제당 앞에 가 장작불을 피우고 고양주가 제물을 진설한 후 바로 제사로들어간다.

    제의는 산제당의 경우 제관․축관․심부름꾼(2인) 등처럼 직접 동고사의 소임을 맡은 자만이 참여하지만, 장승제의 경우는 이외 농악대와 마을 주민들도 함께 참여하여 지낸다. 제사 당일 새벽에 마을 청소년들이 미리 산제당과 장승 주위를 청소해 놓고 금줄을 쳐놓는다. 제사는 양자의 경우 모두 유교식으로 진행되며, 제물진설 - 분향재배 - 헌작 - 독축 - 재배 - 헌작 - 소지- 음복의 순서로 진행된다. 소지는 제주와 이장을 위한 소지가 각 한장씩, 그리고 가호당소지가 있고 또 별도로 소지를 원한 사람들의 소지가 있다. 별도로 소지를 원한 경우 따로 비용을 낸다. 단, 장승제에서는 소지를 하지 않는다. 소지를 마치고 나면 제물 약간씩을 한지(주민들은 이 한지를 “시고지”라 부름)에 쌓아 제장(祭場)에 깔아놓은 짚 위에다 올려놓고 나머지 제물은 도로 갖고 온다. 참고로 산신데와 장승제에 쓰인 축문을 아래에 게재한다.
    山神祝

    歲次 ○○ 正月 ○○ 朔 ○日 ○○
    部落代表 幼學 ○○ 敢昭告于
    土地之神 今爲送舊迎新 歲謁謹告
    居住洞民 永世安眠 歲歲豊年
    三災不侵 一切災殃 不離消滅
    此神基保佑 俾無後艱 所願成就
    謹以淸酌 脯醢秪薦 于神尙

    守門將軍祝

    歲次 ○○ 正月 ○○ 朔 ○月 ○○
    部落代表 幼學 ○○ 敢昭告于
    守門將軍 今爲送舊迎新 歲謁謹告
    居住洞民 不純不侵 ?和定著
    永無事故 此神基保佑 俾無後艱
    所願成就 謹以淸酌 脯醢祇薦
    于神尙

    이렇게 산제당의 동고사를 마치고 산제당에서 제관 일행이 내려 오면 마을에서는 미리 대기 하고 있던 농악대와 마을 주민들이 제관 일행과 함께 동행여 다시 장승제를 지내기 위해 장승에게로 간다.
    여기서도 제사는 앞의 방식과 동일하지만 제물만 다시 새것으로 차린다. 장승제를 마치고 제관들의 간단한 음복과 함께 심부름꾼 2인이 제사를 지내고 난 음식을 당일 저녁 각호당으로 나누어 준다. 장승제가 끝난 후에는 참여한 사람들끼리 풍물치고 술을 먹으며 날을 새기도 한다.

    기 타
    제보자의 말에 의하면 몇 년 전 제주로 선정된 자가 제일전에 돼지가 새끼를 낳는 것을 보았는데, 그날 저녁에 돼지의 엉치뼉가 부러져 죽은 일이 있었다 한다. 이것은 부정을 삼가야 할 제주가 조심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산신이 노해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하며, 지금 사담리가 옛날에 비해 많이 쇠락한 것도 동고사를 소홀히 모시는 탓이라고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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